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독서
- IT 기초
- 캐시 박 홍
- 어둠의 속도
- 푸른숲
- 보라프렌즈
- Elizabeth Moon
- 에세이
- 허블
- The Kind Worth Killing
- 김초엽
- 문학동네
- Peter Swanson
- 소설
- 마이너 필링스
- 원래 그렇게 말이 없어요
- 합격 후기
- 독서기록
- 부디 얼지 않게끔
- 아오야마 미치코
- 오혜
- 엘리자베스 문
- 갤럽 프레스
- 휴랭 머랭
- 책
- SF
- The Speed of Dark
- 노시내
- 지적사고
- twig
- Today
- Total
rk_dal RECORD
어둠의 속도_엘리자베스 문(푸른숲) 본문
✔완독: 5월 10일
✒기록: 5월 11, 23일
📜카테고리: SF, 소설
이 책은 SF로 태그를 달아놓기는 했지만 SF라고 하기 애매한 부분이 있다. 공상과학적 요소가 눈에 띄게 드러나는 작품은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보다 좀 더 발전된 미래의 의학기술이 나온다는 점을 제외하면 SF에 속하지 않는 소설로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주인공 루는 ‘자폐증’을 가진 사람이다. 이 책 속 세상에서는 자폐증을 고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었다. 하지만 루는 그 기술의 혜택을 보기 이전의 사람이다. 이제는 더 이상 자폐증을 가진 사람들이 태어나지 않지만 의료 기술의 발전이 있기 전의 사람들은 계속 존재한다. 그런데 루처럼 성인에게도 적용 가능한, 아직은 임상 시험 단계인 의료 기술이 개발되고, 루와 같이 자폐증을 가진 사람들은 그 수술을 받을지 말지 고민한다. 이것이 전체적인 책의 줄거리다.
루가 일하고, 생각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장면들을 보면서 결국 사람들은 다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모두 다르고, 결국 그렇게 ‘다르다’는 것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다. 세상에 같은 사람은 한명도 없다. 모두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루도 나와 다른 한 사람일 뿐이다. 그저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이 일어날 때 사람은 당황하고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그것이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게 하는 시작점이 되는 것이 아닐까?
루가 하는 고민, 생각들을 따라가다 보면 나도 사회의 관습적인 것들에 대해 많은 의문을 가지게 된다. 우리가 왜 이렇게 행동하고 있었지? 하고.
밑줄 친 문장
그러나 나는 크렌쇼 씨가 말한 ‘어울리다’의 의미가 궁금하다.
크렌쇼의 경우 여기서 말하는 정상인의 범주에 속함에도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반면 루는 정상인의 범주에 속하지 않지만 펜싱 교실 사람들, 다른 자폐증에 걸린 사람들, 그 밖에도 많은 사람들과 잘 지낸다.
‘어울린다’는 행위를 위해서는 나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태도도 중요하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것처럼. 한 사람만 완벽하다고 해서 어울림이 완성될 수는 없다. 결국 어울리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이해하고 존중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펜싱 교실 사람들과 루가 잘 지내는 것처럼. 서로를 존중하면 정상인이든 아니든 간에 잘 어울릴 수 있다.
무지 또한 서로의 어울림에 걸림돌이 되는 요소이다. 정상인들이 자폐인들은 어떠할 것이라는 자신만의 경험과 상상으로 구성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루도 정상인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다. 상대방을 내가 생각한 틀에 가둠으로써 그 이면의 것을 보지 못하게 된다. 이 또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이유 중 하나이다. 편견에 갇히기 이전에 무언가의 본질을 알려고 진실로 노력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는 ‘바트가 진짜 두꺼비’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분명히, 돈이 진짜 밥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실제로 바트가 피부가 울퉁불퉁한 양서류는 아닐 것이다.
작중에서 루는 은유, 비유에 대한 이해를 어려워한다. 하지만 정상인이라고 해서 은유와 비유의 기원, 유래를 모두 알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는 밥맛이야.’라고 할 때, 밥맛과 재수없음의 관계를 알고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래서 그런지 루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단지 그런 관용적 표현, 은유, 비유를 많이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잘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단어 자체의 뜻과 속뜻이 연결되지 않아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것일까? 이렇게 파고들어가면 ‘이해’란 무엇인지도 모호해진다. ‘이해’하고 말한다는 것이 말의 뜻을 정확히 알고, 기원을 알고 말하는 것이라면 정상인도 항상 이해하고 말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어쨌든 누구에게나 어떤 표현을 처음 들어보는 순간은 존재한다. 정상인이나 루나 마찬가지로.
나는 그 대신 말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안다. 나는 오직 나를 대표해서만 말한다. 모든 사람이 그래야 한다.
노력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같지 않다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행동만이 의미가 있다.
노력에는 행동이 포함되지 않는 걸까?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노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나? 항상 노력이란 행동이 포함된 개념이라고 생각해왔던 터라 이렇게 분리해서 보는 시각이 새롭다.
무지가 실제로 존재한다 싶을 때도 있지. 그저 앎이 없는 상태보다 더 실체적이고 드센 무언가가 말일세.
처음 펜싱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나는 펜싱도 이해하지 못했다. 왜 플뢰레를 특정한 자세로 잡아야 하고 양 발끝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도록 서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나는 내가 펜싱을 잘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자폐증이 방해가 되리라고 생각했고, 처음에는 실제로 그랬다. 이제는 정상인들과 토너먼트에서 겨루었다. 우승은 못 했어도 다른 첫 출전자들보다 잘했다.
어쩌면 지금보다 뇌에 대해 더 많이 알기 위해 공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날지 모르겠지만, 도전해 볼 수는 있다.
사람들은 관습적으로 “어떻게 그런 일이”라든지 “정말 속상하겠어요”라고 말하지만, 크렌쇼 씨는 정상인이면서도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유감스럽지 않은지도 모른다. 표현할 인정이 없는지도 모른다. 나는 느끼지 않을 때에도 관습적인 말을 하도록 배워야 했다. 그것이 적응하고 함께 어울리는 법을 배운 행동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크렌쇼 씨에게 적응하라고, 함께 어울리라고 말한 적이 없을까?
그러나 그는 내 삶 속으로 밀고 들어오며, 나를 서두르게 하고, 내가 느리고 멍청한 사람인 것처럼 느끼게 한다. 그것은 괜찮지 않다. 허나 그는 친구처럼 행동하며 나를 돕는다. 도움에 감사하는 것은 중요하다.
자전거의 흔들리는 예측 불가능성을 두려워했던 때와, 그 예측 불가능성을 제거하고, 자전거의 본질적인 혼돈을 의지로 극복하는 방법을 알아냈을 때의 기쁨도 마찬가지로 기억한다.
의사들의 말은 모두 말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단어들 이면에 어조가, 어조 이면에 문맥이 있다. 문맥 이면에서는 밤처럼 거대하고 어두운 정상적 사회화라는 미지의 점 몇 개가 별처럼 반짝이고 있다.
돈이 강제로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를 불편하게 하는 이유를 안다.
나는 어떤 신호들을 이해하지만, 그 신호들이 보다 이치에 닿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이너 필링스_캐시 박 홍(마티) (0) | 2022.06.12 |
---|---|
죽여 마땅한 사람들_피터 스완슨(푸른숲) (0) | 2022.06.01 |
부디, 얼지 않게끔_강민영(자음과모음) (0) | 2022.05.03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_김초엽(허블) (0) | 2022.05.03 |
도서실에 있어요_아오야마 미치코(달로와) (0) | 2022.05.01 |